상여의 변천과 유형


한국에서 상여를 언제부터 사용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. <<고려사>>에 상여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고려시대 이전부터 상여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. 하지만 그 당시 사용하였던 상여의 형태와 규모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. 현재 남아 있는 상여는 대부분 조선시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. 각종 문헌과 실물 상여를 참고하여 상여의 변천과 유형을 엿볼 수 있다.

수레형 상여(유거)와 메는 상여

고대 경전에 설명된 상여의 이미지를 복원한 모습. 이 이미지는 흐로트(J. J. M de Groot)의 저서인 <<중국의 종교체계>>에서  빌려온 것이다. 원래 상여는 바퀴가 달려 있어서 끌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. 그리하여 상여의 명칭도 유거(柳車)라 하였다. 유(柳)는 다양한 장식을 한 데 모았다는 의미이고, 거(車)는 바퀴 달린 수레를 뜻한다.

조선시대 김장생이 저술한 <<가례집람도설>>(1685년 간행)에 나오는 유거의 모습.

 조선 초기에는 유거를 사용하였다. 세종은 국상 때 사람들이 어깨에 멜 수 있는 상여로 바꾸도록 하였다. 이 유거는 일반에서도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.

<<주자가례>>에 소개된 대여의 모습. 대여란 큰 상여란 뜻이다.  <<주자가례>>는 그동안 사용했던 유거 대신 대여를 사용하도록 규정하였다. <<주자가례>>는  조선시대 관혼상제를 규정했던 의례집이다.

 

별갑형 상여

세종의 명을 받아 1451년 편찬된 <<오례의>>에 소개된 왕실 대여의 모습. 지붕은 자라 등처럼 만들었기 때문에 별갑이라 하였다. 별갑 맨 꼭대기에는 연꽃 모양의 장식을 하였다. 별갑 네 귀퉁이에는 용의 머리 모양을 만들어 끼웠고, 용의 입 부분에는 유소를 드리웠다.  대여 본체 네 면은 명주로 짠 옷감에 꿩을 그려 넣은 진용을 둘렀다.

조선시대 양반 상여의 모습. 이 상여는 정조22년(1798년) 윤행임의 어머니 조씨의 상례 때 사용하였던 대여이다. 지붕은 별갑형 덮개로 만들었고, 꼭대기에 연봉오리가 있다, 네 모퉁이에는 봉황의 머리를 끼웠다. 상여 앞뒤에 정자용이 배치되었다. 전체적인 모습이 왕실 대여와 유사하다.

1844년에 간행된 <<사례편람>>에서 소개된 소여의 모습.  소여는 작은 상여를 뜻한다. 규모나 장식 면에서 대여와 비교할 때 매우 소박했던 것으로 보인다. 이 소여는 대여를 만들 형편이 못되는 집에서 사용했다. 전체적인 모습은 왕실 대여 및 양반의 대여와 유사하다.

 

가옥형 상여

1451년 편찬된 <<오례의>>에 소개된 견여. 지붕의 박공 부분이 반원형의 형태로 되어 있지 않다. 용마루 양 끝에 용 머리를 끼웠다. 네 귀퉁이에 용 머리를 만들어 끼운 것이 보인다.

1856년에 제작된 산청 전주최씨 고령댁 상여. 지붕의 형태가 <<오례의>>에 묘사된 왕실 견여와 닮았다.
조선시대 후기로 올 수록 상여 둘레에 많은 꼭두가 배치되기 시작하였다.

 

가마형 상여

1474년  성종 때 편찬된 <<국조오례의>>에 소개된 왕실 견여의 모습. 견여는 대여 보다 규모가 작은 보조 상여이다. 지붕의 박공 부분이 반원형의 형태이고, 앞 뒤 박공 위에는 용마루를 설치하였다. 용마루 양 끝에는 두 마리의 용 머리를 끼웠다. 견여 네 귀퉁이에도 각각 용 머리를 설치하였다.

1800년 정조 국상 때 사용했던 견여.

반원형으로 된 앞 뒤 박공 표면에는 용을 그려 넣었다. 박공 위에 설치된 용마루 양 끝에는 황룡과 청룡의 머리를 새겨 끼웠다. 네 귀퉁이에 각각 용 머리를 설치한 것이 보인다. 

조선시대 양반 상여. 숙종 1년(1675년)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상례 때 사용했던 상여이다. 전체적인 모습이 왕실 견여와 거의 같다. 반원형 형태의 용수판이 보이고, 그 위에 청룡과 황룡이 일자 형태로 얽혀 있다. 견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상여 네 귀퉁이에 용 머리 대신 봉황의 머리가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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